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틴아메리카 근현대사 (문단 편집) === [[멕시코 혁명]]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멕시코 혁명)] 19세기 말 당시 멕시코의 1인당 국민 소득은 미국/영국의 10분에 1 정도에 불과했고, 남미 아르헨티나에 비해서도 몇 배는 더 못살았다. 카우디요들의 쇄국정책 및 [[미멕전쟁]]의 대패 이후 인구만 급증하면서 멕시코인들의 빈곤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되었다. 이미 당시에도 멕시코의 막장 치안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는데 유럽의 악단들이 멕시코로 공연하러 왔다가 강도당하는 일이 자꾸 반복되어서 유럽인 예술가나 사업가들이 멕시코를 방문하기 기피하는 등등 참담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된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멕시코의 현대화를 위한 여러 개혁정책을 추진하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멕시코인들의 생계 문제가 더 악화되었다. 기존의 멕시코 농촌은 마을 주민들이 토지를 공동소유하고 공동경작하던 방식이라 생산성이 매우 낮기는 했다. 문제는 당시 포르피리오 디아스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제국]]의 [[표트르 스톨리핀]]처럼 저리 대출을 해주어 부농을 육성하고, 새로 땅을 개간하도록 든든하게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 멕시코인들이 경작하던 농경지들을 통째로 미국 기업에 팔아먹었다는데 있었다. 다른 한편 디아스는 광물 '''채굴권'''을 미국에 팔아먹는 방식으로 광산업을 육성하였고, 멕시코인 노동자들이 미국인 근로자들에 비해 급여가 작은 것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파업을 하자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하였다. 포르피리오 디아스는 당시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잔학무도한 원주민 말살 정책을 모방하였다. 멕시코 북부 [[치와와(멕시코)|치와와 주]], [[소노라 주]], [[시날로아]] 주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을 일부러 들볶아서 반란을 조장한 후에, 원주민들이 봉기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원주민들의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치와와 원주민 부족 지도자들을 사슬에 묶어서 태평양 앞바다에 던져버렸다.] 이후 원주민들로부터 강탈한 땅을 친지들이나 미국계 부동산 회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멕시코 북쪽 끝 치와와에 거주하던 야키족은 인구 3만여 명 가운데 절반이 멕시코 남부 [[유카탄 반도]]로 강제 추방당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30년 장기독재에 반대하던 [[프란시스코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민심이 극도로 흉흉했던 바로 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이로써 멕시코 혁명이 시작되었다. ||[[파일:attachment/에밀리아노 사파타/Example.jpg]]|| || [[판초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가 [[멕시코 시티]] 입성 후 찍은 기념사진. [* 독수리 의자에 앉은 사람이 비야, 모자를 잡은 사람이 사파타이다. [[멕시코 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로, 두 혁명가의 표정이 다르며 관련 일화가 있는데, 멕시코 시티에 입성한 뒤 비야는 이 자리에 앉아 본 후 사파타에게 앉아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사파타는 "나는 이 자리를 원한 게 아니라 토지를 얻기 위해 싸웠다. 우리는 모든 야심을 없애기 위해 그 의자를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 멕시코의 도농갈등으로 인해 혁명은 복잡다단하게 진행되었으나 결국 혁명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주축으로 한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제도혁명당은 그동안 멕시코의 발전을 옥죄왔던 카우디요들의 쇄국정책을 타파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의 스페인 공화파 난민들을 수용하고 동시에 동유럽의 아르메니아인, 폴란드인 및 유대인 난민 상당수를 수용하였다.] 1940~1970년대 멕시코 부흥의 기반을 닦았다는 점에서 나름 성공한 혁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